현재 우리 주변의 산을 바라보면 여름에는 푸르고 겨울에는 하얀 이파리가 맺히는 아름다운 절경이 당연하다시피 펼쳐지지만 과거의 동네 뒷산을 바라보면 여름에는 푸르고 겨울에는 하얀 것은 동일하지만 산의 이미지를 담당하는 나무 대신 아무것도 없는 땅만이 존재하는 민둥산에 불과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조선은 전란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했던 15세기 이후 16 ~17세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고 음식을 조리하는데 쓰이거나 집을 짓고 여러 생필품 등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목재의 수요도 따라서 증가하였기 때문에 거의 유일했던 에너지 생산원인 목재의 수요가 한반도의 작은 생산 환경에 따른 부족한 공급보다 많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온돌의 대중화와 갯벌에서의 자염 생산, 17세기 후반에 온 소빙하기에 따른 땔감의 가격 상승 등 경제적, 사회적 요인으로 인하여 박정희 정부 시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조선 정부도 이러한 행태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였다. 시작은 나무의 부재로 인해 약해진 지반이 비가 오는 날에는 무너져 여러 토사가 발생하게 되어 그것이 수질을 오염시키고 주택가로 밀려 들어오는 현상이 발생했고 이러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정부는 금산을 지정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고 대규모 나무 심기 사업을 진행하는 등 노력을 하였지만 문제는 여전히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량과 한반도의 고유한 기후 환경 때문에 나무를 심는 족족 죽어가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결국 한반도의 산은 민둥산이 되어 가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게 된 일제강점기, 당연히 일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민둥산을 복원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고 오히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으로 인해 기껏 남아있는 나무들마저 벌목하여 민둥산화가 더욱 더 가속화되는 일이 벌어졌고 곧이어 일어난 일본의 항복, 6.25 전쟁 등으로 인해 산에 대한 관심도는 점점 더 낮아지게 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산림 파괴, 전쟁 후 복구 사업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산림은 사실상 이미 끝난 상태가 되었으며 오죽하면 UN에서도 한국의 산림 복구 가능성이 없다라고 말할 만큼 심각했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집권 이후 강력한 행정력을 투여하며 상황은 달라지게 되는데, 일단 연료 문제를 석탄개발사업을 통해 해결하고 도벌을 방지하는 단속을 강화해 산림을 파괴할 이유를 없애고 본격적인 산림녹화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제 1차 치산녹화10년계획’ 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이 사업은 기본목표를 국토의 녹화에 두고, 새마을 운동을 통한 조림애국사상의 생활화로 녹색혁명을 이룩하는 것을 기본방향으로 두어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추진되었다. 이 사업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지역에 따른 알맞은 나무를 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자연보호, 산림보호 등의 여러 목적을 추가로 달성하는 데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원래 82년까지로 계획한 것을 78년에 조기 완료하고 2차 계획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중형목으로 산림을 조성하자는 계획과는 다르게 고유종이 아닌 리기다소나무와 일본잎갈나무 등의 외래종이 한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었고 진행하기로 한 3차 계획이 박정희의 죽음과 여러 이유로 인해 실행되지 않게 되었고 결국 활엽수림으로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