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임진왜란 시 군무를 총괄하고 이순신을 천거하며 훈련도감을 설치하는 등 국방 안보의 확립을 위해 국비를 강화했다고 한다. 류성룡은 정유재란 후에 관직을 사양하고 저술에 몰두하여 이책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썻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류성룡은 소신있는 삶을 살았다고 여겨진다.
<br>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을 징비록에 남겼다. 전쟁 시기의 조정과 백성, 전쟁터의 상황을 기록해 후대에 반성의 거울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읽혀질 정도였다고 한다.
<br> 류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서 지난일을 경계하여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기위해 책을 썻다고 했다. 그런데 징비록의 ‘징’이란 글자에는 아픈적이 있어서 경계할 줄 안다 라는 뜻이 있으니 결국 류성룡은 우리나라에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고 징비록을 쓴 것이다.
<br>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 중 하나로는 붕당정치의 심화를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전에 통신사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간 동인인 김성일과 서인인 황윤길이 각기 다른 의견을 내 놓아서 전쟁의 대비가 소흘해 졌던 것이다. 또한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는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전쟁의 조짐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없게 했다.
<br> 또 다른 원인으로는 일본의 정세에 어두웠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부터 전란의 단초가 있었다. 일본국 사신으로 온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태오와 국서 내용이 매우 거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 까닭을 알아보지도, 기민하게 대처하지도 않았다. 또한 세종 이후로 조선은 조선통신사 파견을 급격히 줄였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 조총이라는 신무기의 존재를 알 방도가 없었다.